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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2. 27. 20:22

무망지재(無妄之災) 기타(其他)/명언(名言)2010. 2. 27. 20:22

  고사성어에 ‘무망지화(毋望之禍)’라는 말이 유명합니다. ‘뜻하지 않게 화(禍)가 닥치는 것’을 의미하는 말인데, 『주역』의 25번째 괘인 무망(无妄)괘의 세번째 효사의 ‘무망지재(無妄之災)’와 다른 의미를 가진 말은 아닙니다.

『주역』의 무망(无妄)괘의 세번째 효사를 살펴보면, ‘无妄之災(무망지재) 或繫之牛(혹계지우) 行人之得(행인지득) 邑人之災(읍인지재)’로 되어 있습니다.

 

즉, 무망의 재앙(无妄之災)이란 누군가가 소를 매어두었는데(或繫之牛) 지나가던 사람이 가져가 버리니(行人之得) 마을사람들이 의심을 사게 된다(邑人之災)는 말로 연결됩니다.

나쁜 놈(?)은 소를 가져간 지나가던 행인입니다. 그런데 그 불똥이 고을사람들에게 튀니 억울하게 감수해야만 합니다. 즉, ‘어이없는 재앙’을 만나게 된 것을 빗대어 무망지재(无妄之災)라는 주역의 명언을 인용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살다보면, 나의 잘못과는 상관없이 생기는 재앙이 적지 않습니다. 하늘이 가뭄이나 홍수를 내리는 것은 사람의 뜻이 아니라고 애써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사람에게 당하는 경우는 화가 나기도 합니다. 술취한 취객에게 행패를 당하거나, 음주운전에 뺑소니를 당하거나 하는 것은 재수없는 일, 똥 밟은 일이라 하며 넘길 수도 있지만, 믿었던 사람에게 당하는 경우도 비일비재 한 것이 인생입니다.

 

내 책임이라고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무망지재(无妄之災)의 재앙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늘을 원망하여야 할까요? 사람을 원망해야 할까요? 하늘이 의미없는 재앙을 내린다면 어찌 태초부터 사람들이 받들어 오던 하늘일 수 있겠습니까? 가슴이 무너지는 억울한 고통이 생길지라도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고래로부터 성현들이 하시던 말씀이 있습니다. 하늘은 쓸모없는 것은 만들지 않고, 의미없는 일은 벌이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그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원망으로 가득찰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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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오빠야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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睽 小事 吉
【初九】悔亡 喪馬勿逐 自復 見惡人 无咎
【九二】遇主于巷 无咎
【六三】見輿曳其牛掣 其人天且劓 无初有終
【九四】睽孤 遇元夫 交孚 厲 无咎
【六五】悔亡 厥宗 噬膚 往 何咎
【上九】睽孤 見豕負塗 載鬼一車 先張之弧 後說之弧 匪寇婚媾 往 遇雨則吉

  규(睽)괘는 어긋나다는 뜻이니, 단절과 헤어짐을 뜻한다. 12번째의 비(否)괘와의 차이는 비(否)괘는 수치스러워도 숙이고 복종하면 어울림을 유지할 수도 있지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기에 헤어지는 것이며, 규(睽)괘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단절이다. 예를 들면 이혼을 하여 다른 길을 가는 결별은 비(否)괘이지만 배우자와 사별(死別)하게 되는 것은 규(睽)괘이다. 37번째 가인(家人)괘에 이어서 등장하는 이유는 부인이 지아비를 잃는 상황을 상정한 까닭이다. 과거 전쟁 등으로 사별하는 여인들이 많았기에 과부들도 많았을 것이다.

 

睽 小事 吉
헤어짐(睽)은 작은 일로 받아들여야(小事) 길(吉)하다.

  헤어짐은 하늘의 순리로 편안히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만남은 이별의 시작이며 만남이 있었기 때문에 이별이 있게 되는 것이다. 만나지 않았으면 이별이란 있을 수도 없는 것이니, 주역에서 말한 원형리정(元亨利貞)의 자연의 섭리라고 받아들여야 길하다.

 

悔亡 喪馬勿逐 自復 見惡人 无咎
후회가 없다면(悔亡) 잃어버린 말을 다시 찾으려 하지 마라(喪馬勿逐) 스스로 돌아오기 마련이다(自復) 악인을 외면하지 않아야(見惡人) 허물이 없다(无咎)
  후회가 없어야 한다(悔亡)는 것은 자책은 하지 마라는 말이다. 떠나는 것(사랑)을 막으려 하지 말고 오는 것(惡人)을 거절하지 말아야 한다. 악인(惡人)은 마음속에 살고 있는 악마이니 임을 떠나 보내고 원망이 생기는 것을 뜻한다. 그를 외면하지 말라는 말이니 역설적으로 ‘자책을 하지 말고 하늘을 원망하고 미워하라’는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 원망(惡人)은 저절로 떠나갈 것이기 때문에 허물이 아니다. 옛 성현들께서 강물을 대하시며 생각하시던 ‘그 들고나는 물은 쉼 없이 바뀌지만 강물이 흐르는 것은 변함없이 일정한 모습이구나’하는 뜻과 닮아있다. 사랑은 다시 찾아온다.

 

遇主于巷 无咎
우연히(遇) 거리에서 주군을 만나니(主于巷) 허물이 없다(无咎).

  잃어버린 말은 찾으려 하지 않아도 스스로 돌아오듯 사랑은 다시 찾아온다. 나의 새로운 주인 될 낭군님도 우연히 골목에서 만나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주역은 수절하고 사는 과부를 상정하고 있지 않다.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아들이는 “형사취수”는 동양에서는 여성에게 선택권이 있었다고도 하니(고구려 고국천왕의 부인이었던 우씨의 산상왕 선택) 홀로된 여인을 배려하기 위한 까닭이었을 것이다.

 

見輿曳其牛掣 其人天且劓 无初有終
소가 끌어야 할 수레를 보니(見輿曳其牛掣) 그 사람이 코가 잘리고 죄수의 표식을 하고 수레를 끌고 있다(其人天且劓)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나(无初) 끝이 있는 것(有終)이다
.
  한 사람의 삶이 너무도 비참한 지경이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있어 안타깝고 가여운 마음에 저절로 눈물이 흐르고 어찌할 줄 모르게 될 것이나 그 사람의 불행한 삶도 하늘(영원한 시간)의 관점에서 보면 찰나일 뿐이다. 하늘 아래의 모든 것은 변하고 끝이 있기 때문에 영원히 불행한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은 끝이 있으며, 모든 만남은 이별이 있다. 죽음의 의미를 깨달으면 어찌할 바를 모를 정도의 큰 일은 아닌 것이다.

 

睽孤 遇元夫 交孚 厲 无咎
이별은 외로움을 낳지만(睽孤) 근원적 아버지를 만나게 되니(遇元夫) 믿음으로 교류하면(交孚) 위태로워도(厲) 허물은 없다(无咎).
  사람이 혼자 남겨지고 고독해지면 깨달음이 생긴다고 한다. 근원적 아버지(元夫)는 종교로 말하면 신이며 철학으로 말하면 깨달음일 것이다. 아프고 괴롭기 때문에 근원적 아버지를 만나고 그를 믿고 따르며 구원을 바라는 것은 냉정할 수 없는 상태에서의 믿음이라 위태로움은 있을 것이지만 의지해도 허물은 아니라고 한다.

 

悔亡 厥宗 噬膚 往 何咎
후회를 없애면(悔亡) 가족이나 종족이(厥宗) 고기를 씹도록 해 줄 것이니(噬膚) 그렇게 나아감(往)에 어찌 허물이 있겠는가(何咎)

  후회는 스스로 자책하여 자신을 망치는 것을 말한다. 자책하지 않고 이별의 순리를 인식하고 순리로 받아들여 작은일(小事)이라 여기는 것이 후회를 없애는 것이니,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다면 가족과 종족으로부터 위로해주고 보살펴주는 도움의 손길이 있을 것이다. 피는 물보다 진하기 때문이다.

 

睽孤 見豕負塗 載鬼一車 先張之弧 後說之弧 匪寇婚媾 往 遇雨則吉
이별은 외로움이 따르나(睽孤) 진흙을 바른 돼지를 만나게 될 수도 있어(見豕負塗) 한 수레의 귀신처럼 실려온다(載鬼一車) 먼저 화살로서 맞서보면(先張之弧) 후에 활을 내려놓게 될 것이니(後說之弧) 도적이 아니라 혼인을 청하러 오는 것이다(匪寇婚媾) 손잡고 나아가면(往) 비를 만나 진흙이 씻겨져 나갈 것이니 길하다(遇雨則吉)
  사별하고 난 후 그 슬픔을 극복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주역은 말한다. 팔을 벌려서 새 인연을 맞아 들이지는 못하더라도 귀신이라 여기고 ‘화살로서 맞서보라’고. 그러면 그가 귀신이 아니라 돼지임을 알게 되고, 결합하러 찾아 오는 새 인연임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나에게 사랑을 기대하지 말라고 날을 세우면서도 서서히 마음이 열려 새로운 사랑을 찾아가는 드라마의 줄거리가 생각나는 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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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오빠야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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臨 元亨利貞 至于八月 有凶
【初九】咸臨 貞吉
【九二】咸臨 吉 无不利
【六三】甘臨 无攸利 既憂之 无咎
【六四】至臨 无咎
【六五】知臨 大君之宜 吉
【上六】敦臨 吉 无咎

  임(臨)괘는 다스림을 뜻하는 말이지만, 원형리정(元亨利貞)과 관계하는 ‘하늘의 다스림’을 말하니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어쩔 수 없는 숙명(宿命)이다. 순탄하게 원형리정의 변화의 과정을 겪으려면 때가 맞아야 하고(乾) 자리가 맞아야 하고(坤) 사람을 만나야 하고(屯) 노력해야 하지만(蒙) 그것만으로 순탄한 원형리정의 변화를 겪을 수는 없다.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기도 하고, 교통사고를 만나기도 하여 원형리정의 순탄한 변화를 겪을 수 없게 되기도 하니, 이러한 인간이 장악할 수 없는 우연성에 의해 지배되는 것을 숙명이라고 한다. 『중용』의 ‘비록 성인이라 하더라도 알지 못하는 부분이 있으며, 하늘과 땅처럼 위대한 존재에게도 사람들이 서운해 할 일이 있다’[중용 제12장]는 것이다.

 

臨 元亨利貞 至于八月 有凶
숙명(臨) 역시 변화의 순리(元亨利貞)를 좌우한다 그러나 8월에 이르면(至于八月) 흉함이 있다(有凶)
  씨로부터 시작해(元) 성장하고(亨) 열매를 맺고(利) 사라지게 되는(貞) 순탄한 변화의 과정을 겪으려면 하늘의 뜻이 맞아야 한다. 8월은 더위의 정점(양기의 최고점)을 지나는 시간이다. 즉, 숙명에 대해 극단으로 치우쳐 받아들이면 흉하다. 양의 극단은 분노로 폭발하는 것이며, 음의 극단은 체념하고 삶을 포기하는 것이다. 하늘을 원망하지 않아야 한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봉황이 날아오지 않고 황하에 상서로운 그림이 나오지 않으니 나로서는 어쩔 수가 없구나”[논어 제9편 자한 제9장]라고 아쉬워 하셨고, 은자(隱者)들로부터 ‘불가능한 것을 하려고 하는 자’라고 비웃음을 샀지만, 최선을 다해서 사명을 다 하셨다.

 

咸臨 貞吉
마음으로 교감하여 숙명(咸臨)을 맞음은 끝까지 길하다(貞吉).
  유전적으로 장애를 갖고 태어나기도 하고, 고아가 되기도 하고, 강도를 만나기도 하고, 교통사고가 나기도 하지만 그 어쩔 수 없는 숙명을 바라보는 마음은 원망하는 마음이 아니라 교감하는 마음이어야 길하다. 하늘의 뜻을 알 수는 없지만 마음을 다하여 숙명이라는 손님을 거부하지 않으니 곧 어렵고 힘들어도 주어진 삶을 사랑하는 자세를 견지하라는 말이다.

 

咸臨 吉 无不利
마음을 다하여 숙명(咸臨)을 따름은 길(吉)할 뿐 아니라, 이롭지 않음이 없다(无不利).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는 사람도 있고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는 사람도 있고, 아프리카에서 태어나는 사람도 있고 미국에서 태어나는 사람도 있고, 조선시대에 태어나는 사람이 있고 현세에 태어나는 사람도 있어 사람마다 어찌할 수 없는 정해진 숙명적인 삶을 맞이하게 된다. 아무리 싫어도 나의 부모가 아니라고 할 수 없으며, 남자가 아니라고 할 수 없으며, 흑인이 백인이 될 수는 없다. 만족스럽지 못한 상황을 한탄하고 원망하여 벗어나고 싶어 몸부림을 치는 것이 아니라, 그 정해진 숙명 속에서의 '나'를 사랑하고 나의 주위를 보듬어야 한다는 주역의 가르침이다. 공자께서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탓하지 않으며 아래로 인간사를 배워 위로 천리를 깨달았다”[논어 제14편 헌문 제35장]고 하셨다.

 

甘臨 无攸利 既憂之 无咎
달콤한 숙명(甘臨)을 꿈꾸면 유리할 것이 없으나(无攸利) 뉘우치고 근심함이 있다면(既憂之) 허물이 없다(无咎)
  나의 부모가 재벌이라면 나에게 로또가 당첨된다면 하는 달콤한 상상은 현재의 부모님을 원망하게 하고, 하늘을 원망하게 한다. 그러한 달콤한 숙명을 꿈꾸면 유리할 것이 없다. 하지만, 과거에 그러했더라도 깨달음이 있어 뉘우치고 반성을 하였다면 허물이 없다. 주역에서 ‘고치면 그것으로 좋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효사가 참으로 많다. 공자 말씀하시길 "잘못을 하고서도 고치지 않으려는 것을 잘못이라고 한다"[논어 위령공 제15편 제30장]고 하셨으니, 고치지 않고 궁색한 변명을 찾고 잘못을 합리화 시키려는 것이 문제이다.

 

至臨 无咎
최선을 다해서 숙명(至臨)에 순응함은 허물이 없다(无咎).
  인생 일체가 ‘하늘의 뜻'이라고 ‘숙명'이라고 핑계를 삼고 수동적으로 살려고 하는 나약함을 가져서는 안되며, 반대로 좋은 숙명에 처한 이도 거만하고 교만해서는 안된다. 하늘이 그렇게 다스린(臨) 이유를 공경하는 마음으로 다가가는(至) 것이 지림이니, 원망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편안히 받아들이는 것이 허물이 없다. 가난이 싫다고 가족과 단절하여 뛰쳐 나가고, 병든 부모를 부양하지 않고 버리는 사람이 문제이다.

 

知臨 大君之宜 吉
숙명을 아는 것은(知臨) 임금의 뜻(大君之宜)이므로 길(吉)하다.

  숙명의 진의를 깨달으면 사명(하늘이 맡긴 임무)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주어진 숙명적인 상황을 한탄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하늘의 뜻을 헤아려 사명을 다하여 조화를 이루는 세상은 임금이 바라는 세상의 모습이니 길하다.

 

敦臨 吉 无咎
절도 있게 숙명을 따르니(敦臨) 길(吉)하고 허물이 없다(无咎).
  세상만사가 모두 숙명으로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태어난 신체와 태어난 고향은 바꿀 수 없는 것이지만, 대부분의 삶은 사람의 노력으로 개척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이다. 『중용』에 “남이 한 번에 그리하면 나는 백 번 할 것이며 남이 열 번에 그리하면 나는 천 번을 하면 된다”[중용 제20장]고 하였으니, 숙명은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 발전적인 미래를 도모하는 것이 곧 숙명에 대해서 절도를 지키는 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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