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의 실천 - 하늘이 명한 그대로의 성(性)을 따르는 것 간상(赶上)/보충(補充)2010. 2. 20. 19:46
교과서『중용』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늘이 명한 것을 성(性)이라 하고 [天命之謂性]
성(性)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고 한다 [率性之謂道]
-
도(道)는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니 [道也者 不可須臾離也] 떨어질수 있다는 것은 도(道)가 아니다 [可離非道也]
「도(道)를 행한다는 것」은 어떤 것이며,
「도(道)」라는 것은 어떠한 것임을 명쾌하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우선 「도(道)를 행한다는 것」의 개념을 보기로 하겠습니다.
따라야 할 것은 오직 그대로의 성(性)입니다.
스승도, 부모도, 남편도, 조상도 아닙니다.
책도, 좋은 말도, 인격자도, 지식도 아닙니다.
머리도 아니고, 육체도 아닙니다.
오직 성(性)입니다.
순자의 말이 그런 의미입니다.
도(道)를 따르지, 군주를 따르는 것이 아니며,
의(義)를 따르지, 아버지를 따르는 것이 아니다
유가는 공자를 칭송하고 존경하지만, 공자를 따르지는 않습니다.
'성(性)'을 따릅니다. 곧 도(道)를 행합니다.
오직 성(性)만을 따른다는 것은
잘못된 분별을 일으키는 마음에서도 벗어남을 말합니다.
모든 것을 텅 비워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치우침을 일으키는 것을 비워버리고
성(性)을 진실하게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가(儒家)와 도가(道家)가 정반대에 있는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새로워지라는 유가의 일신(日新)이나,
날마다 벗어내라는 도가의 일손(日損)이나
가두고 있던 것을 떨쳐내는 유가의 유위(有爲)와
가두고 있던 것을 비워내는 도가의 무위(無爲)는
같은 말, 다른 표현입니다.
알아도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아는 것 모두를 말로 완벽하게 할 수 있습니까?
들어도 모든 것을 들을 수도 없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입니다.
그렇게 말이라는 녀석과 귀라는 녀석은
또한, 눈이라는 녀석과 머리라는 녀석도 마찬가지로
제가 가진 성(性)에 따라 한계가 있습니다.
머리로만 만나려는 사람은
그대로의 성(性)도 머리만을 통해서 알아낼 수 있다는 맹신에 갇힌 것일지 모릅니다.
똑똑한 자공이 말(言)에 갇혀가고 있자 공자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말하지 않으려 한다. (중략)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
네 계절이 운행되고 만물이 생장하나
하늘은 아무 말이 없지 않느냐?" [논어 제17편 양화 제1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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