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隨 元亨利貞 无咎
【初九】官有渝 貞吉 出門交 有功
【六二】係小子 失丈夫
【六三】係丈夫 失小子 隨 有求 得 利居貞
【九四】隨 有獲 貞 凶 有孚 在道 以明 何咎
【九五】孚于嘉 吉
【上六】拘係之 乃從維之 王用亨于西山

  신하는 임금을 따르고, 자식은 부모를 따르고, 부인은 남편을 따르라는 그 따름은 무조건적인 순종과 복종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소인유(小人儒)들이 그렇게 변질시켜 놓은 것일 뿐이다. 왕이 왕도를 행하지 않으면 왕이란 잘못된 이름을 가진 악한에 불과하니 이름을 바로잡기 위해 엎어버려도 된다고 맹자께서 말씀하셨으니, 마찬가지로 남편이 남편의 도리를 다하지 않고 부모가 부모의 도리를 다 하지 않으면 남편이 아니며 부모가 아니다. 자식을 학대하고 심지어 성 노리개로 삼는 자가 부모라고 해서 자식이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가? 순자께서도 “도를 따르지 군주를 따르지 않으며, 의로움을 따르지 아버지를 따르지 않는다"고 하셨고, 공자께서도 “군주는 군주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합니다”[논어 제12편 안연 제11장]고 하셨으니, 유학은 「정명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수(隨)괘에서 말하는 따름은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따름이며 맹목적 복종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隨 元亨利貞 无咎
따르는 것(隨)은 순탄하게 변하도록 하니(元亨利貞) 허물이 없다(无咎)

  따름의 도(道)는 따뜻한 곳으로 움직이는 것과 같은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따름이다. 주역의 첫 4괘는 원형지정의 순탄한 변화를 맞이하기 위해, 시간을 따르고(乾) 자리를 따르고(坤) 사람을 따르고(屯) 바른 도리를 따르는(蒙) 것을 말했다. 여기서는 그러한 따름의 도(道)에 관해서 말하는 것이니,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따름이어야 태어나서(元) 자라고(亨) 결실을 맺고(利) 죽는(貞) 원형리정의 순탄한 변화를 맞이할 수 있어 허물이 없다고 한다. 추운 겨울이 아니라 따스한 봄에 씨를 뿌리고(元) 메마른 모래밭이 아니라 비옥한 땅에 씨를 뿌리고(坤) 밟아 죽이려는 자가 아니라 거름을 주고 보살펴주려는 사람을 만나고(屯) 그늘 속에 있으면 태양을 더 잘 받기 위해서 몸을 비트는(蒙) 그러한 따뜻하고 편안함을 지향하는 따름이어야 한다.

 

官有渝 貞吉 出門交 有功
관직에 변화가 있는 격변의 시기(官有渝)에는 끝까지 길 하려면(貞吉) 문밖으로 나와서 사귐을 가져야(出門交) 이루는 것이 있다(有功)
  관직에 변화가 있는 것은 권력이 부딪히는 격동기이기 때문이다. 주역은 그러한 격동기라면 몸을 웅크리고 숨어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문 밖으로 나오라고 한다. 그리고 그 격동기를 헤쳐나가는 지혜를 사귐, 곧 사람(人)을 통해 찾아야 한다고 한다. 문밖으로 나와서 사귐을 가지는 것은 두루두루 널리 사귐을 갖는 것을 뜻한다. 따름의 도(道)는 수동적인 웅크림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격변의 시기를 따르는 도(道)는 적극적으로 문 밖을 나서는 것이다.

 

係小子 失丈夫
소인과 관계(係小子)하는 사귐은 장부를 잃게 된다.
  문 밖을 나와 두루두루 사귐을 가지더라도 소인배와 교제를 하라는 말은 아니다. 소인(小人)은 부정적인 의미보다는 필부필부하는 보통의 사람을 뜻하는 의미로 쓰이지만, 여기서의 소자(小子)는 정말로 소인배를 뜻하는 부정적인 의미이다. 장부(丈夫)는 사(師)괘에서는 ‘신체가 건장한 남자’로 풀었지만, 여기서는 ‘마음이 건장한 남자’를 의미하니 군자(君者)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내가 소인배와는 함께 어울리고 있으면 장부는 그런 사귐을 가지는 나와도 상종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係丈夫 失小子 隨 有求 得 利居貞
장부와 관계(係丈夫)하여 소인배를 잃는다 해도(失小子) 그러한 사귐을 따르고서야(隨) 구원이 있고(有求) 득이 있게 된다(得) 그렇게 끝까지 자리를 지켜야(居貞) 이롭다(利)
  두리번거리면서 다른 기회를 찾으려고 잠시 의탁하는 따름이 아니라 끝까지 그 자리를 지키는 지조(志操)있는 따름을 말한다.

 

隨 有獲 貞 凶 有孚 在道 以明 何咎
따르면서(隨) 사사로이 챙기면(有獲) 끝까지(貞) 흉(凶)하니, 뜻을 가지고(有孚) 도리를 하다고(在道) 숨김이 없으면(以明) 어찌 허물이 있겠는가(何咎)
  따르면서 사사로운 챙김을 추구하면 어찌 상대도 이로움을 따져서 대하지 않겠는가? 이익을 챙기려는 마음이 개입하면 그 교류는 오래 지속될 수 없다.

 

孚于嘉 吉
뜻을 아름다운 것에 두어야(孚于嘉) 길(吉)하다.
  짐승들도 따뜻한 곳을 찾아서 모여든다. 인간도 본능으로 어느 곳이 따뜻한 곳인지 안다. 맹자께서 측은지심(惻隱之心)을 설명하며 ‘어린아이가 물에 빠지려 할 때 놀라며 구하려는 것은 아이의 부모와 교분을 맺기 위해서도 아니며, 사람들로부터 칭찬 받기 위해서도 아니며, 아이의 울음소리를 싫어해서도 아니고 본능적으로 측은한 마음이 발동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셨으니, 보통 사람들은 슬픈 영화를 보면 눈물이 샘솟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오늘날에는 오히려 배워서 영리해져서 어린아이가 물에 빠지려 하면 도움을 주러 달려가지 않는다. 천성적으로는 모성(母性)을 가지고 있지만, 인간이 영리해져서 낙태를 하고 제 이익을 꾀하곤 한다. 그래서 공자께서는 "사람의 천성은 서로 가깝지만, 학습으로 멀어진다"고 하셨다[논어 제17편 양화 제2장]. 바른 도리를 들으면 그것이 따뜻한지를 누구나 알지만 ‘그렇게 살면 손해다’라는 영리함을 개입시킴으로써 따뜻한 곳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는다.

 

拘係之 乃從維之 王用亨于西山
구속이 되고 얽매이게 되더라도(拘係之) 사람들이 따르고(乃從) 받쳐주게 될 것이니(維之), 임금이라면 서산에 제사를 드려 물어볼 일이다(王用亨于西山)
  뜻을 아름다운 곳에 두면 사람들이 좋아하여 따르게 될 것이니, 임금이라면 서산에 제사를 드려 확인해 보라는 말이다. 뜻을 아름다운 곳에 두었다면 백성들이 따를 것이요, 뜻이 바르지 못하다면 백성들이 외면하게 될 것이다. 교활하고 아름답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들까지도 무대 위에 등장하는 인물은 바르고 아름답게 사는 사람이어야만 박수를 친다. 그들도 본능적으로 따뜻하고 아름다운 것이 좋은 것임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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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오빠야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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需 有孚 光亨 貞吉 利涉大川
【初九】需于郊 利用恒 无咎
【九二】需于沙 小有言 終吉
【九三】需于泥 致寇至
【六四】需于血 出自穴
【九五】需于酒食 貞吉
【上六】入于穴 有不速之客三人 來敬之 終吉

  주역은 첫 괘에서 ‘잠용일 때 움직이려 하지 마라’고 충고하면서,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그 때가 언제일까? 그에 대한 답이 되는 괘가 수(需)괘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청하지 않은 세 명의 손님이 찾아오면 때가 도래하였다고 하였으니, 곧 사람이 인지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을 만나게 되는 때이다. 대부분의 동물은 본능적으로 따뜻한 곳을 찾아 움직인다. 그러나 사막에 사는 동물도 있고 북극에 사는 동물도 있다. 스스로가 따뜻하다면 따뜻함을 좋아하는 사람(귀인)이 찾아올 것이요, 스스로가 차갑다면 추위를 좋아하는 사람(악인)이 찾아올 것이다. 결국 바르게 살면 그 바름(따뜻함)에 이끌려 찾아오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공자께서는 “덕은 외로울 수가 없으니 반드시 이웃이 생긴다”[논어 제4편 이인 제25장]고 하셨다.

 

需 有孚 光亨 貞吉 利涉大川
기다림(需)은 뜻이 있어야(有孚) 크게 형통하니(光亨) 끝까지 길하다(貞吉). 큰 강을 건너는 과단성을 가져야 이롭다(利涉大川)
  부(孚)는 주역에서 정말 자주 만나게 되는 단어다. 새가 알을 품는 것을 뜻하는 글자인데, 믿음, 신념, 마음, 사상 등등 적당하게 번역하기가 어렵다. 어쨋건, ‘생각 없는 것’의 반대되는 개념이다. 여기서는 뜻을 추구하기 위한 기다림이어야지 생각 없이 시간만 보내는 것을 경계한 뜻으로 새기면 될 것이다. 생각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은 기다림이 아니라 시간의 낭비일 뿐이다. 리섭대천(利涉大川) 또한 주역 전편에서 자주 만나게 되는 말이다. 큰 강은 ‘소통의 어려움’을 상징하는 것이니, 잘 소통되지 않더라도 건너라는 과단성을 의미하고 있다. 『맹자』의 "부유하고 귀한 것이 흔들 수 없고, 가난하고 비천한 것이 바꾸게 할 수 없고 위협과 무력이 굽히게 할 수 없다"는 구절이 떠올려진다.  
 

需于郊 利用恒 无咎
장소를 벗어난 기다림(需于郊)이라면 뜻을 잃지않고 확고히 하여야 이롭고(利用恒) 허물이 없다(无咎)
  유비가 때를 기다리며 농사꾼으로 지내기도 했고, 흥선대원군이 바보 행세를 하며 세도가의 가랑이를 기어 다니며 걸식을 하였다는 얘기도 전한다. 그러나 가슴에 품은 뜻은 변함이 없었을 것이다(恒). 힘겨우면 쉽게 현실과의 타협을 하려는 마음이 생기는 법이다. 

 

需于沙 小有言 終吉
모래밭에서 기다림(需于沙)은 소소한 비난은 있을지언정(小有言) 끝내 길하다(終吉)
  모래밭에서 기다리는 것은 쉽게 장소를 옮길 수 있는 곳에서 기다리는 것을 말한다. 교수를 꿈꾸던 사람이 잠시 곤궁을 벗어나려고 학원강사가 되었다가 헤어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학원강사로서 보람과 즐거움을 느껴 ‘정착’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오히려 자신이 있어야 할 제자리를 찾아간 것일 것이다. 모래밭과 진흙밭은 ‘강물’이라는 위험에서 멀리 떨어져 있거나(모래밭), 근접하여 있는(진흙밭) 거리의 차이라고 구별하기도 한다.  
 

需于泥 致寇至
진흙밭에서 기다림(需于泥)은 도적을 불러들이는 일이다(致寇至)
  진흙밭에서 기다리는 것은 쉽게 장소를 옮길 수 없는 곳에서 기다리는 것을 말한다.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빠져 나오기 힘든 곳에 있는 것이니, 그런 장소로 나아가 기다리는 것은 자기의 가장 소중한 시간을 훔쳐가고 있는 도적을 만나고 있는 것이다.

 

需于血 出自穴
피가 흐르게 되면(需于血) 스스로 굴 밖으로 나와야 한다(出自穴)
  혈(血)은 신변에 위협이 되는 위험이 닥친 것으로, 주역은 기다림을 고집하지 말고 굴 밖으로 나오라고 충고한다. 그 곳에서 참고 기다리는 것은 기다림으로 합리화 시키면서 고집을 부리는 것과 다름없는 것일게다. 기다림은 수동적으로 웅크리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적극적으로 움직일 수도 있어야 한다. 위험을 방관하는 것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를 버리는 것이다.

 

需于酒食 貞吉
경제적 기반 속에서 기다려야(需于酒食) 끝까지 길하다(貞吉)
  술과 음식은 생계에 대한 걱정은 없는 것을 말한다. 과거 선비들이 산림에 묻혀서 처사형 학자로서 일생을 살 수 있었던 까닭은 생계에 대한 걱정이 없었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공자께서 왜 다재다능한지를 질문 받고 “젊어서 곤궁했기 때문에 잡다한 기술을 배웠다”고 하셨다[논어 제9편 자한 제6장]. 성인께서도 뜻을 펼치기 이전에 생계를 먼저 돌아보신 것이다.  『상전』은 길한 까닭을 ‘중정(中正)하기 때문이다’고 해설한다. 유가(儒家)는 이로움을 혐오하지는 않는다. 행복은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행복이 물질과 완전한 별개로 떨어져 있다고 보지도 않는 것이 유학의 시선이다. 때를 기다림도 최소한의 물질적 기반은 갖추어야 길할 것이다. 

 

入于穴 有不速之客三人 來敬之 終吉
목적지로 나아감은(入于穴) 청하지 않은 세 명의 손님이 찾아오는 때이니(有不速之客三人) 그들을 공경으로 받들면(來敬之) 마침내 길하다(終吉)
  세 사람의 손님은 천지인(天地人)이다. 궁극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사람 즉, 귀인이라고 부르는 이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세 명의 손님을 공경으로 받들어야 한다고 하니, 하늘과 땅과 사람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말라는 주역의 당부도 담겨있다. 입우혈(入于穴)을 피냄새가 진동하여 빠져나왔던 그 위험한(血) 곳으로 찾아가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삼인(三人)을 많은 사람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어떻게 해석해도 통(通)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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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오빠야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