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3

« 2024/3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08

比 吉 原筮元 永貞无咎 不寧方來 後夫 凶
【初六】有孚 比之无咎 有孚盈缶 終來有它 吉
【六二】比之自內 貞 吉
【六三】比之匪人
【六四】外比之 貞 吉
【九五】顯比 王用三驅 失前禽 邑人不誡 吉
【上六】比之无首 凶

경쟁은 사람이 모이면 이뤄질 수 밖에 없는 것이고, 경쟁은 다툼(訟)과는 달리 상대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므로 긍정적인 것이다. 그래서 비(比)는 두 사람이 나란히 같은 방향으로 서 있는 모습이다. 공자께서도 “군자는 겨루지 않지만 활쏘기는 예외이니 서로 읍하여 예를 갖추고 당에 올라 시합한 후 벌주를 마시는 것이다. 이런 것이 군자의 경쟁인 것이다”[논어 제3편 팔일 제7장]라고 하셨다. 명중하지 못하는 이유를 남에게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구하는 것이니, 공자께서 말씀하셨던 ‘남에게 요구하지 않고 나에게 요구한다’는 취지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比 吉 原筮 元永貞 无咎 不寧方來 後夫 凶
경쟁(比)은 길하니(吉) 처음 점을 친(原筮) 마음으로 처음부터(元) 끝까지(貞) 계속되면 허물이 없을 것이나(无咎) 편안하지 않아(不寧) 다시 점을 치려는 마음이면(方來) 그 후에는 장부라도(後夫) 흉할 것(凶)이다.
  주역의 네 번째 몽(蒙)괘에서 말한 처음 점을 치는 마음과 재차 점을 치는 더렵혀진 마음을 빗대어 경쟁의 길흉을 논하고 있다. 처음에 순수한 경쟁으로 시작한 마음이 끝까지 계속되어야지 길하고 허물이 없지만, 그 마음이 바뀌어 승부욕이 생긴 이후라면 흉하다고 한다. 성리학이 리(理)와 기(氣)의 관계를 두고 오랫동안 논쟁을 벌였던 것과 같이 ‘행동이 마음을 이끌 수 있는가’는 쉽게 답하기 힘든 논제일 것이다. 일례로, ‘착한 행동을 의식 없이 하다 보면 착한 마음이 생기는가’의 문제인데, 어쨋건 주역은 행위가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처음에는 훈육하는 마음으로 뺨을 한대 때렸다가 자기도 모르게 동물적 폭력성이 발동하여 아이들을 무참히 폭행하는 한 교사의 동영상이 유포되어 문제가 되기도 했다. 경쟁이란 행위를 시작하여도 그 행위에 내재한 승부욕에 굴복하지 말고 처음의 순수성을 끝까지 지켜야 길하다고 한다.

 

有孚 比之无咎 有孚盈缶 終來有它 吉
신념을 가진(有孚) 경쟁이어야 허물이 없다(比之无咎) 신념을 질그릇을 넘치게 할 정도로(有孚盈缶) 돈독히 하면 경쟁이 끝나도 상대가 남아있게 될 것이니(終來有它) 길하다(吉).
  신념이 있는 경쟁이란 승부욕이 배제된 예컨대, 함께 지혜를 모아 찾아가는 그러한 경쟁이다. 질그릇을 넘치게 할 정도로 넉넉한 마음이 아니라면, 모르는 것도 아는 것으로 둔갑시키고 한양을 못 가본 이가 한양을 가 본 이를 이기려 하니 곧, 경쟁이 아니라 다툼(訟)이 되어버린다. 점을 재차 치는 더럽혀진 마음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공자께서 “아는 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것이 진정으로 아는 것이다”[논어 제2편 위정 제17장]라고 하셨다.

 

比之自內 貞 吉
경쟁이라는 것은(比之) 자기 내면(自內)과의 승부라면 끝까지(貞) 길하다(吉).
  경쟁의 본질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어야 한다. 자기 자신에게 찾지 않고 그 탓을 남에게 돌리면 원망하고 미워하게 된다. 이미 여러번 언급하였지만, 공자께서 “군자는 자기에게 요구하고 소인은 다른 사람에게 요구한다”[논어 제15편 위령공 제21장]고 하신 말씀과 같은 맥락이다.

 

比之匪人
경쟁이라는 것은(比之) 사람이 우열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匪人).

  실력이 절대적으로 이기는 것이라면 아마도 스포츠 경기는 재미가 없어서 존재하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브라질이 늘 월드컵에서 우승하지는 못하는 이유는 반드시 전력으로만 우열이 가려지지는 않고 "승운"이라는 알 수 없는 힘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전적으로 사람이 장악할 수 없는 것이 또한 경쟁의 결과이다.

 

顯比 王用三驅 失前禽 邑人不誡 吉
사냥 같은 큰 경쟁에 있어서도(顯比) 임금은 세 방향만 막고(王用三驅) 한 곳은 남겨두는 법이다. 설령 사냥감을 놓쳐도(失前禽) 백성들이 두려워하지 않게 하는 배려이니(邑人不誡) 이런 경쟁이 길하다(吉)
  세 방향을 막고 한 곳을 남겨두는 것은 그 책임을 자기에게서 찾으려는 것이지 다른 곳에서 찾으려는 것이 아닌 까닭이다. 사냥감을 놓친 백성탓이 아니라 한방향을 막지 않도록 한 임금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고자 한 까닭이다. 경쟁에서 뒤쳐진 자가 두려워해서는 안 되는 것이 길하다는 의미이다. 오늘날 학생들의 시험은 싸움이 아니라 경쟁이다. 그런데, 경쟁에서 뒤쳐지면 두려워 해야 한다. 승자독식의 세상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比之无首 凶
그러나 경쟁에서 우열을 정하지 않는 것(比之无首)은 흉하다(凶)

  우열을 정해주지 않으면 경쟁이 끝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역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고 그리고 다시 시작되는 순조로운 변화를 말한다. 그러나 경쟁이 시작되어 우열을 정하지 않는다면 끝맺음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니 흉하다.

:
Posted by 오빠야닷컴
06
訟 有孚 窒惕 中 吉 終凶 利見大人 不利涉大川
【初六】不永所事 小有言 終吉
【九二】不克訟 歸而逋 其邑人三百戶 无眚
【六三】食舊德 貞厲 終吉 或從王事 无成
【九四】不克訟 復即命 渝 安貞吉
【九五】訟元吉
【上九】或錫之鞶帶 終朝三褫之

  송(訟)괘는 다툼을 의미한다. 싸움은 필요악이다. 공자께서도 "좋구나 좋구나를 연발하는 사람은 덕을 해치는 사람이다"[논어 제17편 양화 제13장]고 하셨으니, 싸울 때는 싸워야 한다. 그러나 싸우지 않아야 할 때 싸우고, 싸움이 지나쳐서 문제가 된다. 본래 유학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군자는 옳고 그름의 잣대를 자기에게 요구하며,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여 억지로 끌고 오려는 이는 아니다. 감화되어 저절로 따라오면 함께 벗이되어 즐겁고, 따라오지 못하면 보살펴주는 역할을 함으로써 즐거운 자이다. 그런데도 왜 싸워야 할 때가 생기는가?

  강도가 약자들의 재물을 뺏고 죽이려 할 때는 맞설 힘이 있다면 맛서야 한다. 강도에게 옳고 그름의 잣대를 강요하여 강도와 싸우려 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 아니라, 해를 당하게 될 사람을 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을 흉기로 찔러 살해하는 행위만이 죽이는 것이 아니다. 우물에 빠질려는 아이를 방치하는 방관도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에게 요구하는 것과 남에게 맞서는 것이 모순은 아니다. 본질적인 문제는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고 그에 간섭하려고 싸울려는 것인지, 물리쳐야 할 해악인지 구별하지 못하는 분별력에 있을 것이다.  

 

訟 有孚 窒惕 中 吉 終凶
다툼(訟)은 추구하는 가치가 있어야(有孚) 하는 것이니, 사사로운 이익을 배척하여(窒惕) 중용의 도(中)를 지키면 길하나(吉) 패자가 생기면 흉하다(終凶)
  어떤 신념을 위해서 다투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사람이 미워서 사람을 누르고 패배 시키기 위한 그러한 다툼은 좋지 못하다. 공자께서 “오직 어진 사람만이 사람을 좋아하고 사람을 미워할 자격이 있다”[논어 제4편 이인 제3장]고 하셨다. 사사로운 감정에 의거하여 나와 같으면 좋고, 나와 다르면 미워하는 그러한 호악을 경계한 까닭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신 “사람이 좋지 않다고 해서 그의 바른 말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논어 제15편 위령공 제23장]는 것처럼 사사로움을 배척하여 중용의 도를 지켜야 길하다고 한다. 종흉(終凶)이란 마침(終) 곧, 끝장나는 자가 생기는 것을 말함이니 그것은 흉(凶)하다는 말이다. 비유하자면, 승자가 쓰러진 자를 내버려 두고 승리만 돌아보는 것이니, 마땅히 쓰러진 자에게 손을 내밀어 일으켜 주어야 하는 다툼이어야 한다. 모두 함께 잘 되기 위해 신념을 다툴 수는 있겠지만, ‘나 살고 너 죽어라’는 다툼은 곤란한 것이다.

 

利見大人 不利涉大川
대인을 만나봄이 이로우니(利見大人) 큰 강의 건너듯 과단성을 가지고 밀어부침은 이롭지 못하다(不利涉大川).
  신념도 그것이 아집일 수 있으니 자문을 구해보기도 하고 더 깊이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공자께서는 “무의무필무고무아(毋意毋必毋固毋我)”하셨다고 하는데 즉, ‘맘대로 해석하는 것, 반드시 하려는 것, 절대로 하지 않으려는 것, 자신만 옳다고 하는 것’ 이 네 가지를 결코 가까이 하지 않으셨다고 한다.[논어 제9편 자한 제4장]

 

不永所事 小有言 終吉
다툼은 오래 지속하지 않으면(不永所事) 소소한 말은 들을지라도(小有言) 마침내 길하다(終吉).
  질질 끌어서 가장 좋지 못한 것 중의 하나가 다툼일 것이다.

 

不克訟 歸而逋 其邑人三百戶 无眚
다툼에 굴복하여(不克訟) 돌아가 숨으면(歸而逋) 그 고을사람 3백호가 편안해지니(其邑人三百戶) 재앙이 없어진다(无眚)
  다툼에서 도망치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주변사람 모두를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는 것이 되기도 한다. 도망치는 자가 비겁하고 수치스러운 사람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더 큰 용기를 가진 사람일 수 있다. 공자께서는 “용감한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는다”[논어 제14편 헌문 제28장]고 하셨다. 결국 용기도 내면적 정서이니 사람의 시선을 두려워 한다면 그것은 참 용기가 아닌 것이다. 단속해야 할 것은 『중용』에서 말하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내면의 마음의 움직임’일 뿐이다. 사람을 향한 부끄러움이 아니라, 하늘(자기양심)을 향한 부끄러움이 없어야 그 자가 용자(勇者)이다.

 

食舊德 貞厲 終吉 或從王事 无成
다투고자 하는 본성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면(食舊德) 끝까지 극복하기 어려운 성향이지만(貞厲) 끝낼 수 있어야 길하니(終吉) 왕의 일을 맡는 큰일을 담당하여도(或從王事) 왕이 되려 하지 않을 것이다(无成)
  성선설을 주장하는 맹자께서도 ‘본연지성’은 선하지만 태어나면서 받은 ‘기질지성’이 달라 선악의 가능성이 공존한다고 하셨으니, 태어난 사람마다 품성의 차이가 있음은 인정하신 것 같다. 유전적으로 강한 호전성을 물려받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유전적인 호전적 성향은 끝내어야 길하다고 한다. 그래야 혹종왕사(或從王事)하여 무성(无成) 유종(有終) 할 수 있다고 한다. 곤(坤)괘에서 나온 것처럼 ‘왕의 일을 대신하여 공로를 탐하는 것이 아니라 바른 결과만을 원한다’는 뜻이다. 공자께서는 “군자가 용감하면서 의로움이 없으면 난리를 일으키게 되고, 소인이 용감하면서 의로움이 없으면 도둑이 된다”[논어 제17편 양화 제23장]고 하셨으니, 호전성을 의로움으로 다스릴 수 없다면 혹종왕사(或從王事)하여 왕이 되려 할 것이다.

 

不克訟 復即命 渝 安貞吉
다툼에서 패하더라도(不克訟) 돌아오라는 요청을 받아(復即命) 승복(渝)하면 끝까지 편안하고(安貞) 길(吉)하다
  패자의 깨끗한 승복은 계속 다투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다툼은 악을 물리치고, 신념을 펼치기 위한 것이어야지 서로 원수로 갈라서기 위한 것이 아니다. 다툼의 결과에 승복할 수 있는 것은 용기를 의로움으로 다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정도전의 장남이었던 정진은 아버지를 역적으로 내몰아 죽였던 태종 이방원으로부터 관직을 제수받고 훗날 형조판서까지 지냈다. 정진의 진심을 속단 할 수는 없지만, 호랑이가 토끼를 낳지는 않는 법이니, 구차하게 살고자 한 까닭은 아니었으리라 생각한다.   

 

訟元吉
다툼(訟)은 근원적(元)으로는 길한 것(吉)이다.
  다툼은 필요악이다. 발전의 원동력이기도 하다. 싸우지 않아야 할 때 싸우고, 싸움이 지나쳐서 문제가 되는 것이다. 당연히 유전적인 용감함도 근원적으로 좋은 것이다. 다만, 의로움으로 바로 세울 수 있어야 한다.

 

或錫之鞶帶 終朝三褫之
호전성이 지나치면 왕으로부터 큰 상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지만(或錫之鞶帶) 마침내 아침이 끝나기도 전에 그 상을 세 번 빼앗기게 될 것이다(終朝三褫之).
  왕의 마음을 아침이 끝나기도 전에 세 번이나 바꾸어 놓을 수 있는 까닭은 호전성이 지나치기 때문이다. 죽음도 불사하는 거침없는 용기는 근원적으로는 길하고 왕에게 큰 상을 받을 만큼 훌륭한 자질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툼 이후에는 왕을 비롯하여 세상 모두가 평화롭기를 원할 것이다. 그렇지만 유전적 호전성을 억누르지 못하기에 아침이 끝나기도 전에 상을 세 번이나 빼앗기게 되는 것이니, 용감함을 의(義)로서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
Posted by 오빠야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