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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깨기

인간도 동물입니다.

‘고도의 지능’이라는 특이한 성(性)을 부여받은 동물입니다.

특이할 뿐인데, 특별한 존재로 구별하려는 시도가 많았습니다.

정(情)이라는 것은 인간의 성(性)이 아니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인간에게서 정(情)이 떨어져나가면 인간은 기계가 되고,

인간에게서 이성(理性)이 떨어져나가면 인간은 동물이 됩니다.

역사적으로 쾌락주의와 금욕주의가 순환하고 있고,

유학의 발전과정도 그러했습니다.

 

흥에 취하고, 신나하고, 울먹이던 공자와 달리,

맹자는 단단했고, 한번도 ‘음악’에 대해서 논한적이 없었습니다.

감성과 이성의 중용을 이탈하여, 이성중심으로 흘렀고,

조선조의 선비는 판박이 기계의 모습으로 꽉 막힌 사람들이 되어갔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정(情)으로 치우치면, 인간은 동물로 접근해 갑니다.

 

인간을 인간으로 구별되도록 하기 위해

하늘이 명(命)하여 준 차별화된 성(性)은 ‘고도의 지능’입니다.

이 녀석은 참으로 위대하지만, 참으로 위험합니다.

불가능을 모르고, 한계를 모릅니다.

인간을 기계보다 더 한 기계로 만들 수도 있고,

인간을 동물보다 더 못한 생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결국은 유학의 배움은, 하늘이 준 ‘고도의 지능’을

치우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중용(中庸)에 맞추는 것입니다.

 

‘고도의 지능’은 해야할 자기 역할이 있습니다.

‘귀’를 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해야 할 역할은 짐승과는 다르게, 기계와도 다르게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들을 수 있는 능력은 다르지만, 귀가 맛을 느끼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이 ‘고도의 지능’은 제 한계를 모릅니다.

이 괴이한 녀석을 그대로 방치해 버리는 것은,

눈이 들을려고 애쓰게 만드는 것과 같고,

귀가 냄새를 맡으려 애쓰게 만드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면, 모든 조화가 깨어지고 부서져 버립니다.

 

그래서 중용 제1장에서 강조합니다. 교육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하늘이 명하여 준 것을 성(性)이라 하고

성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고 하고

도를 행하도록 다듬는 것을 교(敎)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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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오빠야닷컴
04

蒙 亨 匪我求童蒙 童蒙求我 初筮告 再三瀆 瀆則不告 利貞
【初六】發蒙 利用刑人 用說桎梏 以往 吝
【九二】包蒙 吉 納婦 吉 子克家
【六三】勿用取女 見金夫 不有躬 无攸利
【六四】困蒙吝
【六五】童蒙吉
【上九】擊蒙 不利爲寇 利禦寇

  몽(蒙)괘는 몽매함, 어두움을 뜻하는 괘다. 순조롭게 씨앗(元)으로부터 성장하고(亨) 열매를 맺고(利) 죽을(貞) 수 있는 원형리정(元亨利貞)을 이끄는 가장 중요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건(乾)괘 구삼(九三)효의 '군자(君子)가 되어 종일(終日)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乾乾) 것'을 뜻한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다만, 익힐 습(習)자가 어미새의 날개짓을 따라하는 새끼를 상징하고 있는 것처럼, 배움은 날개짓을 보여주는 어미새의 가르침에서 출발을 한다. 그래서 주역의 몽괘는 주로 몽매함을 깨우쳐 주는 입장에서 효사를 서술하고 있다.

  한편, 주역의 첫 4괘가 독립적이고, 순차적인 것은 아니다. 예컨대, 배워(蒙) 자신을 닦고, 때가 되어(乾) 사람을 만나고(屯) 사람을 만나 제 자리로 나아가고(坤) 그래서 다시 나아갈 때가 도래하고(乾) 그렇게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蒙 亨 匪我求童蒙 童蒙求我
몽매함(蒙)은 성장기(亨)의 일이니 내가 동몽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匪我求童蒙) 동몽이 나에게 요구하여야 한다(童蒙求我)

  몽매함을 깨우쳐야 할 때는 성장기(亨)여야 한다. 배움도 배워야할 시간에 맞아야 한다. 동몽(童蒙)은 몽매한 어린아이이다. 그 어린아이가 자발적으로 몽매함을 깨뜨리려 다가와야 하는 것이지, 억지로 어린아이의 몽매함을 깨우쳐 주려고 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주입식으로 교육함은 바르지 않다는 뜻이니, 곧 공자께서 "사람이 도(道)를 넓히는 것이지, 도(道)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다"[논어 제15편 위령공 제29장]라고 하신 말씀과 같은 뜻이다. 스스로 나아가려고 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

 

初筮告 再三瀆 瀆則不告 利貞
처음 점을 치면 미래를 알려주지만(初筮告) 계속 점을 치면 더럽혀지고(再三瀆) 더럽혀지니 알려주지 않는다(瀆則不告). 그렇게 점을 치려면 그쳐야 이롭다(利貞)
  처음 점을 치는 마음은 곧 호기심과 궁금함일 뿐이다. 그러나 계속 점을 치는 까닭은 의심하고 더 이로운 점괘를 원하는 욕심과 탐욕이 생겨난 때문일 것이다. 즉, 마음이 맑지 못하면 점도 배움도 소용없는 것이니 차라리 그치는 것이 이롭다. 
 

發蒙 利用刑人 用說桎梏 以往 吝
몽매함을 깨우쳐 주는 것(發蒙)은 형인을 사용하면(用刑人) 이로우나(利) 그 속박을 풀어주어야 하니(用說桎梏) 형벌로만 나아가면(以往) 어렵게(吝) 된다. 
  발몽(發蒙)은 몽매함을 깨우쳐 스스로를 개발하게 하는 것이다. 형인을 사용함은 곧 매를 들어 엄격하게 가르치는 것을 말함인데, 그러한 교육이 본질적으로는 이로우나 그 엄격한 속박을 풀어주기도 해야 하니, 곧 채찍과 당근의 조화로운 교육이 되어야 함을 말한다. 질(桎)은 손을 묶고, 곡(梏)은 발을 묶는 형구라고 한다. 지나치게 엄격해도 지나치게 달콤해도 바람직한 교육이 될 수 없다. 중용에 서야 한다.

 

包蒙 吉 納婦 吉 子克家
몽매함을 아울러야(包蒙) 길(吉)하니 부인의 생각을 받아들여야(納婦) 길(吉)하다. 그래야 자식이 집안을 잘 이루게 된다(子克家)
  포몽(包蒙)은 몽매함을 함께 보듬어야 한다는 뜻이니 곧, 남편이 부인 의견도 받아들여서 함께 가르치는 것을 말한다. 남자는 여성인 어머니로부터 몽매함을 보완해야 할 부분도 있다. 여자를 이해할 수 있어야 훗날 집안을 조화롭게 세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勿用取女 見金夫 不有躬 无攸利
여자(女)를 취하려 하지마라(勿用取) 그 여자는 사내를 돈으로만 보아(見金夫) 있어야할 곳을 벗어날(不有躬) 것이니 유리할게 없다(无攸利)
  여자(女)는 몽매(蒙)한 여인을 말한다. 계모가 아니라 친모라도 본분을 모르는 사람이 많이 있다. 부인(婦)이 될 자격이 없는 여자(女)이다. 있어야 할 곳은 자녀를 교육하는 어머니의 자리를 말한다. 몽매하여 남자의 돈만 보고 있으니 스스로가 몽매한데, 어찌 자식의 몽매함을 깨우쳐 줄 수 있겠는가?

 

困蒙吝
몽매함이 곤궁하면 소용없다(困蒙吝)

  배움에 뜻이 없고 가르쳐도 되지 않는 아이들을 말함이니, 그런 아이들에게 애를 써도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같은 상황은 아니지만, 공자께서 “썩은 나무에는 조각을 할 수 없고, 썩은 흙으로 쌓은 담장에는 흙손질을 할 수 없다”[논어 제5편 공야장 제10장]고 하신 말씀을 떠 올리게 한다.

 

童蒙吉
차라리 동몽(童蒙)이어야 길(吉)하다
  배움에 뜻이 없고 가르쳐도 되지 않는 곤몽의 아이들은 차라리 동몽으로 남겨두는 것이 길하다는 것이다. 애쓰면 애쓰는 사람도 따라야 하는 사람도 힘들고 고통스럽기만 할 것이다. 이 효사를 ‘어린아이의 순순함을 간직하게 해야 하는 것이 길하다’로 해석하거나, ‘동몽처럼 늘 가르침을 청하는 겸손한 자세를 가지게 하는 것이 길하다'로 해석하기도 한다.

 

擊蒙 不利爲寇 利禦寇
몽매함 깨뜨리는 것(擊蒙)은 도적이 되는 것은 이롭지 않고(不利爲寇) 도적을 방어하는 것이어야 이롭다(利禦寇)
  격몽(擊蒙)은 율곡 이이 선생의 『격몽요결』의 서문에서 언급한 학문이 나아갈 방향을 의미한다. 도적은 사람의 내면에 잠재한 악(惡)성이다. 악성을 없애는 공부가 아니라면, 배운 지식은 도적질을 위해 사용하게 될 것이다. 도적을 방어하는 것은 곧 마음속에 도적이 침범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말함이니, 선성(善性)을 지키는 것을 말한다. 유학에서의 배운 선비는 그 배움으로 부족한 자를 도와야 하는 무거운 짐을 진 자이다. 그래서, 증자께서 말씀하셨다 “선비는 책임이 무겁고 갈 길이 멀다. 인을 짐져야 하니 어찌 무겁지 않겠는가? 죽어서야 그 짐을 내려놓을 수 있으니 어찌 멀지 않겠는가?[논어 제8편 태백 제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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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오빠야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