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3

« 2024/3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유자 말씀하셨네 [有子曰:]
신의는 의로움이 있어야 가까이 하여 그 약속을 지키는 것이며 [信近於義 言可復也]
공손은 예가 있어야 가까이 하여 치욕을 멀리하는 것이며 [恭近於禮 逺恥辱也]
의지하더라도 친근함을 잃지 않아야 따를 수 있는 것이다 [因不失其親 亦可宗也] 

 

  역으로 읽어보면, 정의롭지 않은 약속은 지키지 않아야 하며, 예가 없다면 치욕을 당하더라도 공손하지 않아야 하며, 의지한다고 해서 싫어하면 떠나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앞 장에서 ‘조화만을 위한 조화를 찾는’ 꽉 막힌 사고를 지적했는데, 마찬가지로 꽉 막힌 사고를 지적하고 있다. 무조건을 고수하는 것은 맹신과 맹목을 추구하는 것일 따름이다.

  ‘독립투사들께서 거짓말을 하여 동지를 팔지 않은 것’을 거짓말을 했다하여 신의가 없는 사람이라 할 수는 없다. 거만으로 대하는 무례한 사람에게는 모욕을 당하더라도 공손으로 화답할 필요가 없고, 의지한다고 해서 싫어하는 내색을 보이면 떠나야 하는 것이라 한다.

  이 모두는 ‘내면의 자존(自存)을 잃지 않는다’는 뜻이다. 신의롭다는 것, 공손하다는 것, 친근하다는 것을 얻기 위해서 본질을 버리지는 말고, 스스로를 버리지는 말라는 의미이다. 자존이 무너지면 삶이 고달파진다. '좋은사람 컴플렉스'라는 말처럼, 좋은 평가를 의식해서 끌려다니지는 않아야 한다.

 

 

'간상(赶上) > 논어(論語)'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1편 학이(學而) 제15장  (0) 2013.01.04
제1편 학이(學而) 제14장  (0) 2013.01.04
제1편 학이(學而) 제12장  (0) 2013.01.04
제1편 학이(學而) 제11장  (0) 2013.01.04
제1편 학이(學而) 제10장  (0) 2013.01.04
:
Posted by 오빠야닷컴
유자 말씀하셨네 [有子曰:]
예의 작용은 조화로움이 중요하다 [禮之用 和為貴]
선왕의 도가 아름다웠던 까닭은 [先王之道斯為美]
작고 큰 것이 조화를 이뤄 충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小大由之 有所不行]
조화를 위한 조화만 알고 [知和而和]
예로써 조절할 줄 모른다면 [不以禮節之]
순조로울 수가 없다(참된 조화가 아니다) [亦不可行也]

 

   이 장이 해석이 분분한 이유는 ‘어떻게 해라’는 선명한 실천행위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유가의 철학인 중용(中庸)을 설명하려는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예(禮)는 내면의 실질과 드러난 꾸밈의 조화이다. 마음이 없는 예는 허례이며, 솔직한 마음을 꾸밈없이 다 발산하는 것도 무례이다. 이 두 가지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가?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중용(中庸)의 균형선을 지켜나가야 한다.
 
  그러나, 예라는 것은 곧 조화라고 하여 조화만을 추구하려는 꽉막힘도 문제이다. 아버지가 나쁜 일을 하려고 할 때 힘을 사용해 막아야 하는 행위가 필요할 수도 있다. 형식적 예에 어긋나고 부자간의 조화가 깨어지더라도, 근본의 예[실질]를 지키기 위해서 그래야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참된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이 장의 의미가 쉽게 다가오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일반적이고 늘 그러해야 한다는 고정된[죽은] 원칙은 없다는 중용(中庸)의 조화라는 관념이 정립되면 좀 더 선명해 질 것이라 생각한다.

'간상(赶上) > 논어(論語)'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1편 학이(學而) 제14장  (0) 2013.01.04
제1편 학이(學而) 제13장  (0) 2013.01.04
제1편 학이(學而) 제11장  (0) 2013.01.04
제1편 학이(學而) 제10장  (0) 2013.01.04
제1편 학이(學而) 제9장  (0) 2013.01.04
:
Posted by 오빠야닷컴
유자 말씀하셨네 : [有子曰: ]
그 사람됨이 효성과 공경이 있는데 [其為人也孝弟]
윗사람을 범(犯)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드물더라 [而好犯上者 鮮矣]
윗사람을 범(犯)하기를 좋아하지 않으면서 [不好犯上]
난리를 일으키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而好作亂者]
아직 없었다 [未之有也]
군자는 근본에 힘써야 하며 [君子務本]
근본이 바로서야 도(道)가 생겨난다 [本立而道生]
효성과 공경이라는 것 [孝弟也者]
그것이 인(仁)을 행하는 근본이다 [其為仁之本與]


효(孝)는 부모를 공경으로 대하는 것이며,
제(弟)는 집안어른을 공경으로 대하는 것이다.
부모에 무조건 '복종'하고, 집안 어른에 무조건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는 고마운 마음을 거부할 수 없어 저절로 그리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엄마 아빠가 해 준게 뭐가 있어? 순이 엄마는 X도 해 주고 Y도 해 주는데' 흔히 들을 수 있는 소리다. 고 김수환추기경께서 생전에 '내 탓이요'라는 운동을 하셨던 적이 있다. 세상이 '원망'으로 채워져 가는 것을 그저 두고 보실 수 없으셨던 까닭이었을까?

 

이미 가진 것보다 가지지 못한 것을 탐하는 것이 인생의 한 단면이기도 하기에, 고마움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따져보면 세상은 한없이 감사해야 할 것으로 가득가득 채워져 있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 자신을 살려주고 있는 자연에 감사하는 마음부터 가지는 사람! 그런 사람이 그리운 시대이다. 

만약, 어느 순간 자연이 공기를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연을 욕해야 할까? 
'이 XX 자연아! 당연히 니가 공기를 줘야지, 왜 안주냐?' 하고 욕해야 옳은 걸까?

현대인들이 가장 잘못 사용하는 말이 '고맙습니다'를 '당연하지'로 바꾸는 것이라 생각한다.

'부모니깐 당연히 그래야지...

 

산다는 것은, 내 의지로만 장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부모가 젖을 먹여 살수 있게 도와 주었고,
자연이 햇살과 공기와 물을 주고
하늘이 사고를 당하지 않도록 도와주어
나를 살려주고도 있다.
 

사람은 일체의 도움이 없어도, 저절로 살 수 있는 독립된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사람 인(人) 이라는 한자어는 하나(I)가 하나(I)를 받쳐주는 모습이다.

효(孝)와 제(弟)를 아는 마음은,
내가 나 저절로 잘나서 내가 아니라
나의 생(生)을 도와주었고 도와주고 있음을 아는 안목을 가졌다는 것이다.

'남'을 다 죽이면 나는 살 수 있을까?
'자연'을 다 없애면 나는 살 수 있을까?

  

그래서 진정으로 효(孝)와 제(弟)를 아는 사람은
아버지의 아들에서 단절될 수 없는 '나'를 아는 사람이며,
삼촌의 조카에서 떨어질 수 없는 '나'를 아는 사람이며,
'남'으로 부터 떨어질 수 없는 '나'를 아는 사람이며,
그런 일련에 구속된 '나'가 아니라,
연결되어 있는 '나'를 아는 사람이며.
연결되어 있어 고마움을 아는 사람이다.

'더불어 하나'임을 아는 사람이
나만 보고 남을 범(犯)하려 하고,
나만 보고 난리(亂)를 피우려 하겠는가?

 

유자의 가르침은 한마디로 줄일 수 있을 것 같다.

'고마움을 참으로 아는 것이 인(仁)의 근본이다.'

 

'간상(赶上) > 논어(論語)'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1편 학이(學而) 제6장  (0) 2013.01.04
제1편 학이(學而) 제5장  (0) 2013.01.04
제1편 학이(學而) 제4장  (0) 2013.01.04
제1편 학이(學而) 제3장  (0) 2013.01.04
제1편 학이(學而) 제1장  (0) 2013.01.04
:
Posted by 오빠야닷컴
16

豫 利 建侯行師
【初六】鳴豫 凶
【六二】介于石 不終日 貞吉
【六三】盱豫 悔 遲 有悔
【九四】由豫 大有得 勿疑朋盍簪
【六五】貞疾 恒 不死
【上六】冥豫 成 有渝 无咎

  예(豫)는 코끼리(象)가 자신이 죽을 때를 알고 무덤을 찾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형성문자이다. 일반적으로 미래를 미리 아는 것을 뜻하지만, 주역에서의 예(豫)괘는 ‘죽을 때와 자리를 아는 것’을 의미하니, 곧 하늘이 생명을 세상으로 보내어 맡긴 임무를 뜻한다. 필부필부(匹夫匹婦)하는 소인의 사명은 만나서 아이 낳고 평범하게 먹고 살다가 생을 마감하는 것이고, 대인의 사명은 전체 사회를 위해 봉사하고 희생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하늘이 보통사람보다 뛰어난 재능을 부여한 이유를 그 재능을 사용해 공공을 위해 봉사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였으나 현대에는 뛰어난 재능과 노력으로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라고 한다.


豫 利 建侯行師
사명(豫)은 결실(利)을 맺는 것이니 제후를 세우거나 군사를 일으키는(建侯行師) 것처럼 큰 일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
  주나라는 천자가 큰 영토를 각 지역별로 제후를 세워 실질적 통치를 맡기고 조근, 군대파견 등의 구속을 통해 충성을 맹세 받는 형태의 통치체제였는데, 훗날 제후들의 세력이 너무 커져 춘추전국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다. 여하튼 제후를 세우거나 군사를 일으켜 응징하는 일은 천자만이 할 수 있는 큰 일이다. 예(豫)는 제후를 세우는 것처럼 큰 뜻을 이루어 결실(利)을 맺고자 하는 것을 말한다.

 

鳴豫 凶
사명을 떠벌리면(鳴豫) 흉(凶)하다
.
  삼국지를 보면 유비, 관우, 장비가 어지러운 세상을 구하기 위해 '도원결의'를 한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 뜻을 펼치며, 같은 날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같은 날 죽자는 의로운 맹세였다. 그러나 농사꾼 행세를 하기도 하면서 품은 뜻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았다. 유자께서는 “신의는 정의로움에 비추어 이행하는 것이다”[논어 제1편 학이 제13장]고 하셨으니, 곧 정의롭지 않으면 약속을 저버려도 된다는 말씀이셨다.

  유학에서는 꽉 막힌 원칙을 배격했다. 독립투쟁을 하던 의사들께서 동지들을 팔지 않고 “모른다”고 했던 것이 거짓말이라서 부끄러워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사명을 숨기는 것도 잘못이 아니다. 잠용일 때 움직이려 해서는 안되니(潛龍勿用) 때가 도래하기 까지 숨죽이고 숨길 수도 있어야 한다.

 

介于石 不終日 貞吉
돌에 새긴 듯(介于石) 굳고 단단하게 맹세를 하고 종일(終日) 멈추지 않으면(不) 마침내 길하다(貞吉)
  때론 숨기고 때론 어려움을 겪더라도 사명을 돌에 새긴 듯 굳고 단단하게 유지를 하면 끝내 좋은 결실을 얻게 된다. 현실이 어려워도 타협하지 않아야 한다. 종일 멈추지 않는다는 것은 건(乾)괘의 ‘종일(終日)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어두움을 경계하는 것(終日乾乾 夕惕若)’과 마찬가지의 의미이다.

 

盱豫 悔 遲 有悔
턱을 치켜 들어야 할 만큼의 분에 넘치는 사명은(盱豫) 뉘우침이 있으리니(悔) 시간만 낭비하며(遲) 후회만 남길 것이다(有悔)
  토끼가 호랑이를 잡아먹으려 해서는 안되니, 하늘이 토끼로 세상에 보내었을 때는 토끼로 살면서 생태계를 유지하고 자연의 조화에 따르라는 것이었다. 하늘이 사람을 분별하여 세상에 보낸 이유도 같은 뜻일 것이니 천명이 다르므로 턱을 치켜들어 분수를 지나치면 후회만 남기게 될 것이라고 한다. 옛 시대는 ‘군주주의’의 시대였고, 그래서 공자께서도 세상을 바로잡고자 하였으나 천자의 지위를 탐내지는 않으셨다.

 

由豫 大有得 勿疑朋盍簪
사명을 다하려 한 까닭에(由豫) 크게 얻는 것이 있었다면(大有得) 도와준 친구를 의심하지 않아야 비녀를 꽂을 수 있다(勿疑朋盍簪).

  여인의 치장은 비녀를 꽂음으로써 완성이 되는 것이니, 도와준 친구를 의심하지 않아야 비로소 정점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신 “얻으려 근심하고 잃을까 근심한다”[논어 제17편 양화 제15장]는 의미이니, 얻고 나서 잃을까 근심하여 도와준 친구까지도 의심하는 것을 경계하는 뜻이다. 건(乾)괘에서 용이 비상하는 전성기가 되었다고 은혜를 잊어버리지 말고 마땅히 은인과 함께 그 전성기를 누리라고 하는 것에 연결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貞疾 恒 不死
마지막에 친구를 의심하게 되는 병이 생기면(貞疾) 계속되어(恒) 그 병통을 죽여 없애지 못하게 된다(不死).
  적과 동지가 하루 아침에 뒤바뀌는 경우를 역사에서 많이 목격하게 된다. 믿음이 사라지면, 부리던 자는 자신도 당하지 않을까 두려워하게 되고, 따르던 자는 토끼를 잡고 나면 사냥개는 주인에게 삶아 먹힌다는 '토사구팽'을 염려하여 두려움에 떨기 마련이니, 그 병통을 없애기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정(貞)은 죽음을 뜻하고 곧음을 뜻하고 완성을 뜻하고 끝을 뜻하기도 하니, 모두 죽음처럼 더 이상 변화의 여지가 없음을 의미하는 말이다. 비녀를 꽂는 마지막(貞)에 생기는 친구에 대한 의심의 본질은 두려움일 것이다. 그렇게 정점에 이르러 생겨난 두려움은 없던 상태로 되돌아 가지 않는 이상 절대로 없앨 수 없는 “잃을까 근심하는 두려움"일 것이다. 

 

冥豫 成 有渝 无咎
어두운 사명(冥豫)이 성공할 수도 있으나(成) 변신을 해야(有渝) 허물이 없다(无咎).

  쿠테타도 때로는 성공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사로운 이익과 영화를 위해 추구한 쿠테타(권력찬탈)라면 성공하여도 잠시일 뿐일 것이다. 공자께서 “사람이라면 마땅히 곧아야 할 것인데, 곧지 않은 사람은 요행히 재난을 면하고 있을 따름이다”[논어 제6편 옹야 제19장]고 하셨다. 바르지 못한 것이 오래 지속될 수는 없는 법이니, 정의가 결국은 승리하는 까닭이다.

:
Posted by 오빠야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