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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에 해당되는 글 2

  1. 2013.01.04 반야심경 원문 및 해설
  2. 2010.02.01 중(中)과 중용(中庸)의 관념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큰 지혜로 마음을 피안으로 보내버리자는 경전

  마하(摩訶)는 초월적으로 크다는 뜻이며, 반야(般若)는 지혜라는 의미입니다. 바라밀다는 수행입니다. 반야심경은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라는 주문을 숙지하고 외자는 경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주문은 나를 주체로 삼으면 저 언덕(세계)으로 가자는 것이며, 나를 객체로 하면 저 언덕(세계)로 보내 버리자는 것입니다. 완전히 보내버리자는 것입니다. 무엇을 보내라는 것일까요? 망령된 마음입니다. '없앤다', '비운다', '내려놓는다', '벗는다' 같은 많은 표현이 있지만, 그 의미가 다르지 않습니다.
  갇힌 마음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 바라밀다 수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적극적 표현으로는 잃어버린 본성을 찾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密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관세음보살께서는 깊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하시고
5온이 모두 공(空)한 것을 꿰뚫게 되시어 일체의 고액에서 벗어나시었다.

  5온(五蘊)은 거듭 반복되므로 외워두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5온(五蘊)은 ①색(色)수(受) ③상(想) ④행(行) ⑤식(識)을 말합니다. 

색(色)은 나타나는 것입니다.
수(受)는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상(想)은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행(行)은 움직이는 것입니다.
식(識)은 고정관념을 갖는 것입니다.

 

레몬이 있습니다. 그것은 색(色)입니다.
노란 빛깔과 상큼한 향기를 받아들입니다. 그것은 수(受)입니다.
먹고 싶다 맛있겠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상(相)입니다.
그리고 먹거나 숨겨 놓습니다. 그 반응이 행(行)입니다.
레몬 맛이 남습니다. 레몬을 보면 침부터 고입니다. 이것이 식(識)입니다.

  관자재보살께서 하신 방법을 배워보겠습니다. ① 깊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합니다. ② 그러면 이 5온이 모두 공(空)함을 꿰뚫게 됩니다. ③ 그러면 일체의 고액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사리자야!
색은 공과 다름이 없고 공은 색과 다름이 없으니, 색은 곧 공이요 공은 곧 색이다.
(5온의 나머지 4가지인) 수상행식도 역시 마찬가지니라.

   사리자는 처음에는 회의파 철학자의 제자였습니다. 그래서 논리적인 면이 강했다고 알려졌습니다. 그래서 석가께서 사리자의 논리성을 고려하여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공(空)이라는 관념을 논리적으로 판단하지 말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컵에 물을 채운 후 무엇이 있느냐고 하면 대개는 물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하지만 논리적으로 그것은 '지금'이라는 기준으로 했을 때 맞는 답입니다. '지금'이라는 기준을 놓아버리면 그 답은 어떻게 됩니까? 논리는 다른 한쪽을 받치는 상대성에 의존합니다.


  노자가 말했습니다.[도덕경 제2장]

사람들이 아름답다 하면서 아름답다는 인식만 생겨난 줄 알지만, 추하다는 인식이 받쳐주고 있는 것이고, 착하다 하면서 착하다는 인식만 생겨난 줄 알지만, 못되다는 인식이 받쳐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있음과 없음은 서로를 낳아주며 쉬움과 어려움은 서로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구분하여 하나의 관념으로 여기는 것은 상대적입니다. 승찬스님이 말했습니다.

도(道)에 이르기가 어렵지 않으니, (나누어 한쪽을) 택하려는 마음만 버리면 됩니다[至道無難 唯嫌揀擇] 미워하고 사랑하는 (나누는) 마음만 없어지면 환하게 밝아질 것입니다 [但莫憎愛 洞然明白]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사리자야! 이 세상의 모든 있다는 것의 실체가 공(空)이니,
생겨나는 것도 없고 소멸하는 것도 없고, 더러운 것도 없고 깨끗한 것도 없고,
늘어나는 것도 없고 줄어드는 것도 없느니라.

  살아간다는 관념은 뒤에서부터 기준으로 삼으면(관점을 바꾸면) 죽어가는 것입니다. 살아가는 것과 죽어가는 것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장자가 말했습니다.

이것은 또한 저것이 되며, 저것은 또한 이것이 된다. 그렇다면 과연 저것과 이것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저것과 이것이란 상대적 개념이 없는 것, 그것을 일러 도(道)의 지도리라 한다. 중추가 되어야만 비로소 둥근 고리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어 무궁한 변화에 응할 수 있게 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실체는 모두 공(空)으로 되돌아갑니다. 죽음이 어떠한지 모르면서 죽음을 괴롭게 여기고 두려워할 까닭이 있겠습니까? 단지 내가 존재하지 않았던 100년 전으로 되돌아가는 것과 다를 것이 없는데요.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그런 까닭에 공(空)의 입장에서는 색이 없으니, 수상행식도 없고,
눈귀코혀몸뜻도 없다. 보이는 것, 들리는 것, 향기, 맛, 촉감, 옳음 역시 없느니라.
보이는 것에서부터 생각하는 것까지 아무것도 없느니라.

  색-수-상-행-식은 앞서 관세음보살이 공(空)한 것임을 꿰뚫어 보셨다던 5온입니다. 장미가 붉습니다. 완벽하게 보고 있는 것일까요? 강아지의 눈에도, 나비의 눈에도 그리 보이겠습니까? 절대의 색깔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육체의 한계 내에서 보이는 색깔입니다. 

 

  장자가 말했습니다.

사람은 초식동물의 고기를 먹고, 순록은 풀을 먹고, 지네는 뱀을 먹고, 올빼미는 쥐를 즐기네. 넷 가운데서 누가 '참으로 올바른 맛'을 아는 건가?

 

  사람이 완전하다고 인식하는 것은 '나를 가지기에' 오류를 갖습니다. 눈을 감고 눈의 간섭을 없애면 듣지 못했던 소리가 들릴 수 있습니다. 느끼지 못했던 맛을 느낄 수 있는 법입니다. 우리는 누적된 식(識)으로 인해 맛있게 '번데기'를 먹지만, 외국인들은 혐오스럽게 생겼다는 (識)에 의해 번데기를 보고서는 번데기를 쉽게 먹지 못합니다. 그런데 눈을 감기고 모른 채로 맛보게 하면 잘 먹기도 합니다. 

 

  노자가 말했습니다. [도덕경 제13장]

큰 근심이 있는 까닭은 나에게 몸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자기 자신이 없는데까지 이를 수 있다면 무슨 근심·걱정이 있을 수 있겠는가!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무고집멸도
무지 역무득 이무소득고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無苦集滅道
無智 亦無得 以無所得故

어리석음도 없으며 또한 어리석음이 없는 것도 없으며
결국 늙는 것도 죽는 것도 없고 또한 늙음과 죽음이 없는 것도 없느니라.

괴로움이 없으니 그 원인도 없으며 없앨 수도 없고 따를 수도 없느니라.
깨달음이 없으니 또한 얻을 것도 없으며 얻지 말아야 할 것도 없느니라.

  어리석다는 것, 지혜롭다는 것, 늙어간다는 것, 괴롭다는 것, 깨달았다는 것, 그런 것들은 생각을 하므로 생겨납니다. 사람이라는 한계를 가졌기에 생겨납니다. 호랑이는 배가 부르면 더는 생명을 죽이지 않습니다. 내일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노자가 말했습니다. [도덕경 제20장]

배웠던 것을 끊어버리면 근심 걱정이 사라진다

 

  어떤 이가 얘기합니다. '차라리 몰랐다면 더 좋았을 것을.' 내일 먹을 걱정이 없었으면 하는 지혜로운 생각이 오늘의 걱정을 만듭니다. 늙음을 모르고 죽음이 다가옴도 모른다면, 늙음이 안타깝고 죽음에 대한 걱정이 생길 리 없겠지요. 그렇다면, 공(空)을 말하는 석가, 무위(無爲)를 말하는 노자는 생각을 다 없애서 바보가 되라고 한 것일까요? 결국, 죽음을 찬미하고 있는 것일까요?
   
  석가는 중생구제에 나섰고, 노자는 도덕경을 남겼고, 장자 역시 남화경을 남겼습니다. 비운다는 공(空)과 의욕 하지 않는 무위(無爲)는 허무의 관념을 그린 것이 아닙니다어차피 죽으니 애써 살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공(空)에서 끝남이 아니고 무(無)에서 멈춰지는 것이 아닙니다. 비워지면 채워지기 시작하는 법이고 무(無)에서 다시 유(有)로 흐르는 법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더 의욕적이고 밝게 삶을 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천변만화(千變萬化)에 결코 마음이 요동치지 않고 길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菩提薩陀 依般若波羅密多故
心無罣碍 無罣碍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그런 까닭에 보살께서는 반야바라밀다에 의존하시어
마음에 걸림이 없게 되시었고 마음에 걸림이 없게 된 까닭에 두려움이 없게 되시었고
잃어버린 잘못된 생각을 바꾸어 보게 됨으로써 열반에 이르게 되시었다.

  관세음보살께서는 반야바라밀다를 통해 마음을 붙잡는 것이 없게 되셨으니, 마음을 잡아두고 있는 것이 없게 되셨다고 합니다. '생각이 한번 바뀌는 것'으로서 열반에 이르게 되셨다고 합니다.

 

 맹자가 말했습니다. [맹자 고자 상 11.11]

배우는 도(道)가 다른 데 있겠는가? 자기의 잃어버린 마음을 되찾는 것일 뿐이다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고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三世諸佛 依般若波羅密多故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께서도 반야바라밀다에 의존함으로써
아뇩다라 삼막 삼보리(완전한 해탈)에 이르시는 것이니라.

  관세음보살만 그런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깨달은 분들께서도 반야바라밀다를 통해 궁극의 해탈에 이르게 되셨고, 이르게 된다고 하십니다.
  이것을 믿습니까? 진리의 문은 완전한 믿음과 동행해야 열립니다. 사람은 자기가 언제 태어났는지 자신의 지혜로만 알 수 있습니까? 어머니를 믿지 못하면 자기 스스로는 알아낼 수 없습니다. '주 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구원을 위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구원은 결과로 따르는 것이겠지요. 요체는 참되게 믿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미움과 친하지 않습니다. 참된 믿음이 살기(殺氣)를 키우지 않습니다. 어떤 종교를 믿으시건, 완전하게 나를 맡기고 믿으십시오. 그리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십시오...

         

고지 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능제일체고 진실불허
故知 般若波羅密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能除一切苦 眞實不虛
그러니 반야바라밀다를 알아야 한다.
이는 큰 신(神)이 되는 주문이며, 훤히 밝아지는 주문이며, 더 클 수 없는 주문이며,
이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주문이니,
능히 일체의 고통을 없애주며, 참으로 진실하여 거짓됨이 없느니라.

  이 반야바라밀다가 법(法)은 아니어야 합니다. 좇아야 할 것이 아닙니다. 하고자 함도 욕(欲)이요, 하지 않고자 함도 욕(欲)입니다. 내려놓음, 비움, 피안으로 감도 자연(自然)이 아니라면 욕(欲)입니다. 

 

 승찬스님이 말했습니다[신심명]

있음을 버리려 하면 있음에 빠지고 공(空)함을 따르려 하면 공(空)함을 등지게 됩니다. 

 


고설 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故說 般若波羅密多呪卽說呪曰
그러기에 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을 말씀하셨던 것이었으니, 이제 그 말씀하신 주문을 전해주려 한다.

  지금까지 반야바라밀다의 의미를 석가께서 설명했습니다. 사족을 달자면, 글이 아니라 그 뜻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손가락 끝(글)을 보지 말고 가리키는 달(뜻)을 보라' 했습니다. 노자 역시 도덕경에서 '말이 없는 가르침'을 얘기합니다. 말이라는 표현수단을 보지 말고, 그 뜻(본질)을 보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은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이 아주 작습니다'라며 아쉬워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네가 안다고 생각하는 내가 나의 전부가 아니야'라고 분노하기도 했습니다. 드러난 것과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아주 작습니다. 글 역시 하나의 색(色)입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보내어라. 보내어라. 피안으로 보내버려라. 피안으로 완전히 보내버려라.
그리하면 깨닫게 될 것이다.

보내어라. 보내어라. 피안으로 보내버려라. 피안으로 완전히 보내버려라.
그리하면 깨닫게 될 것이다.

보내어라. 보내어라. 피안으로 보내버려라. 피안으로 완전히 보내버려라.
그리하면 깨닫게 될 것이다.

 

:
Posted by 오빠야닷컴
jung

고전을 읽을 때 극복하지 않으면 길을 헤메는 관문이 있다.
중(中)의 관념이 서지 않으면 혼돈으로 빠져든다.
중(中)에서의 직선은 가둠을 관통하는 있는 것을 말한다.
갇힌 바깥에 있는 것도 아니고, 안에 있는 것도 아니다.
통(通)하여 있는 것이다.
공자께서는 무엇으로 그 가둠을 관통하고 있을까?

공자께서 "증삼아 내가 말하는 도는 하나로 일관하고 있다"고 하자 증삼은 "그렇습니다"고 했다. 다른 학생들이 "뭔 말이야?"라고 묻자, 증삼은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은 지극한 서(恕)야" 라고 하였다. [논어 제4편 이인 제15장]

서(恕)는 같을 여(如)와 마음 심(心)으로 이루어졌다. 마음을 동(同)하여 관통했다는 말씀이다.
말하자면, 중(中)은 가둠의 안과 밖을 마음으로 일관하여(恕) 관통하는 「진리」이다.

원효대사께서 마신 해골에 담긴 물 이야기는 유명한 이야기다.

사물은 변한 것이 없는데 (해골에 담겨있던 물은 똑 같은 물이었지만)
눈으로 보고나니 마음이 변하더라.

이 일화를 「일체유심(一切唯心)」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대학』 역시 마음(心)을 강조한다.

마음이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 [대학 제7장 정심수신]


중(中)은 마음으로 통(通)하여야 알 수 있는 「진리」이므로
노엽고, 두렵고, 좋아하고, 싫어하고, 걱정스러우면 제대로 볼 수가 없다.
공자의 말씀도, 석가의 말씀도, 예수의 말씀도 모두 머리에서 지워내어야 할 것이다.

 

용(庸)은 이러한 중(中)의 진리」에 조화롭게 맞추어 대응하는 「응답이다.
정이의 "바뀌지 않는 것이 용(庸)이다"라는 설명은 오해를 일으키기 딱 좋다. 주희의 "일상이다"라는 설명과 함께 묶어 설명하려고 하니, 진순처럼 "오곡을 먹고 옷을 입는 것은 만고의 일상이라 바뀔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여 갈수록 이해하기만 어렵게 하였다.

 

위 속에 음식이 알맞게 차 있도록 유지시키는 것이 중용(中庸)은 아니다.
그러려면 그 중간을 맞추기 위해 하루종일 조금조금 먹고만 있어야 한다.
밥을 많이 먹고, 다시 많이 부족해지면 다시 과하게 채우는 것이 밥먹는 중용이다.
그래서 배가 부를 때를 만나고, 적당히 좋을 때를 만나고, 배가 고플 때를 만난다.
각 시기(時)에 알맞는 응답은 모두 다르다. 100년치 밥을 한꺼번에 먹고 한꺼번에 배설 할 수도 없다.
그래서 중용의 응답은 시공(時空)의 변화에 따라서 움직이게 된다.
즉, 용(庸)은 일반적 인식으로는 바뀌는 것으로 설명해야 오해가 덜하다.

사람마다 지문이 다르고, 생각도 다르고, 지능도 모두 다르다.
같은 사람이라도 10대, 20대, 30대가 다르다.
이러한 다름을 분별(分別)하여 가장 적합하게 맞추어 조화롭게 응답하는 것이 중용이다.
병(病)을 기준으로 똑같은 약을 쓰는게 아니라,
각 사람의 특성을 기준으로 다른 처방을 하려고 노력했던 것이 동양의학이었고,
역시 중용의 정신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공자께서 제자들마다 그 다른 특성을 감안하여 다르게 가르친 것도 그런 까닭일 것이다.
그래서 공자의 한 마디는 그 한마디 말과 글에만 갇혀서 이해하려면 오해가 생긴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왜, 무엇을 위해서 그러한 대화를 했는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고증의 도움을 받고, 때로는 알 수 없는 대화는 상상하면서 읽을 수 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중(中)의 사유는 안과 밖을 통(通)하는 것이며,
중용(中庸)의 사유는 분별(分別)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불가에서는 어리석은 중생아 개와 너가 다르지 않음을 왜 모르느냐고 한다.
그렇지만 개와 사람이 교감하기 위한 육체사랑을 수긍하지는 않을 것이다.
진리는 개와 사람이 다르지 않으면서 다르기도 하다는 중(中)이며,
진리에 반응하는 응답은 개와 사람이 다르다는 분별(庸-용)이다.

현상계가 만들어 내는 거짓에 갇혀있는 중생들을 어리석다고 하지만,
현상계가 만들어내는 것은 허상이라는 깨달음에 갇혀서, 사람들이 어리석어 보일 수도 있다.
무지(無知)도 생각을 가두고, 지(知)도 생각을 가둔다.
그래서 공자께서는 지(知)도 중용의 선을 지켜야 한다고 하셨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도가 행하여지지 않는 까닭을 알겠구나. 지자(知者)는 과(過)하고 우자(愚者)는 부족하구나” [중용 제4장]


결국 유가의 진리는 세속과 초월의 한 쪽이 아니라 통(通)하는 것이기에,
속세를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다.

높고 원대한 이론으로 나아가 고원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일상생활로 돌아온다.
그래서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잠이 오면 잠을 자는 것이 곧 도(道)이기도 하다.
현실 세상에서 추구하는 도(道)이기는 하여도, 중용의 도리에 맞추어야 한다고 한다.
자기와 남은 별개의 분별(分別)된 개체이면서 또한 유기적으로 연결된 하나이기 때문에
개인(個人)에게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人間)에게로 돌아온다.
그래서 인(仁), 의(義), 예(禮), 지(智)가 필요하게 된다.
그래서 옷을 벗고 싶어도 아무곳에서나 나체로 있으면 안되며 예(禮)를 지켜야 한다.
물론 인(仁), 의(義), 예(禮), 지(智)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중용에 따라 그 적합한 응답은 변한다.

그런데, 성리학이 발달하면서 이 중용의 생기발랄함과 융통성이 없어져 버렸다.

공자의 제자 자하가 말하였다 “큰 덕은 한계를 지켜야 하지만, 작은 덕은 들고 나는 것이다 [논어 제19편 미자 제11장]

송대 이후의 학자들이 이 장을 비난하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다. “작은 덕이 어찌 들고 날 수 있겠는가? 작은 덕이라고 해서 들쑥날쑥한다면, 곧 마음이 방종해져서 큰 덕에 누를 끼치게 될 것이다"는 등등의 실랄한 비난을 받았다. 아마도 자하의 말이었기 때문에 더 그러했을 것 같다. 그러나 자하가 어찌 틀렸다고 할 수 있을까?
송대이후의 학자들도 고원함과 깨끗함을 추구할 수록 사람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이 너무 맑으면 물고기가 없다’고 하였으니, 지나친 고원함은 사람에게서 스스로 멀어지는 것이다. 어쩌면 송대 이후의 학자들은 소인은 멸시하여 멀리하고, 선비라는 자들끼리만 어울리는 계급과 권력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공자께서는 말씀하셨다. “도는 사람에게서 멀어질 수 없다. 사람이 도를 행한다면서 사람에게서 멀어지면 도라고 할 수 없다” [중용 제13장]

단발령이 일제의 강제라고 해서 선비들이 반발한 것이 아니었다. 나라의 명령이라고 해도 따를 수 없었던 신념이었기 때문이다. ‘정절을 유린당한 여인처럼 실성하여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돌아다니다 목을 매었다’는 것이 역사의 기록이다. 어찌 유학만 고여서 막히고 가두어 졌겠는가? 사찰과 교회도 부처님의 참된 가르침과 예수님의 참된 가르침으로부터 벗어나, 가두고 막아버린 것은 없는지 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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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오빠야닷컴